도시의 추상 혹은 로부터 탈주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공간화하면, 역사적 깊이는 결국 사라지고 만다” – 사이먼 레이놀즈

이른바 공간의 시대. 노동의 시간으로부터 탈주하여 말랑한 키치와 지적 패스티시로 무장한 공간에로 접속할 수 있는 시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모르는 일상의 노동인에게 커피숍은 무척이나 고마운 공간이다. 커피한잔의 여유가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시간 자체를 무책임하게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커피숍을 도배중인 국적을 알 수 없는 키치한 이미지들은 혼란보다는 도태의 두려움을 현대적인 쿨함으로 가득 채우며 위안을 준다. 시간의 의미는 사라지고 영원한 공간 속의 끝없는 현재만이 남는다. 시간 속의 ‘나’를 지각함으로써 진전하는 – 행위의 윤리적 정당화, 삶의 가치평가, 미래의 기획으로부터 자신을 반성함 등이 증발한다. 쿨한 공간에서 쿨한 자세로 쿨한 관계를 맺는 당신과 함께 쿨하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시간을 잊게 만드는 무중력의 문화적 공간들이 자본을 가져다주므로 이런 현상은 더욱 가중된다.

사실 이는.. 금일 나의 발걸음이 영원한 현재로의 접속들로 가득했고 오로지 시간 자체를 소비하기 위한 이행들이었음을 자진 고백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근처 커피숍을 갔다)

서울이라는 메가시티 안에서 나는 어디에서나 잉여한 불안감을 느낀다. 지하철의 환승길이든 도시의 거리에든 어떤 방향으로 무언가 가고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압박감이 있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것도 아니한 채로 있는 것 자체를 허용치 않는 서울의 모든 거리가 내게 시간을 어떤 식으로라도 사용하도록 촉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느낌은 딱히 정해진 목적 없는 주말에 배가 된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예술에 관한 존 듀이의 생각을 잠시 엿보았다.

Sensitivity to a medium as a medium is the very heart of all artistic creation and esthetic perception.

존 듀이는 예술 작품에서 매체의 선택은 방법론적 의미 이상으로 작품 자체의 목적을 견인하는 가장 중요한 축으로 보았다. 그의 생각에 대한 검토는 지금 내 일이 아니기에 그저 그가 말한 ‘매체’의 의미에 선상하여, 현대 미술관의 전시이 각기 어떤식으로 매체를 다루고 있을까 기대가 됐다. 동시에 미술관 건축과 공간 자체 또한 하나의 매체로써 수용자에게 각인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미술관이라는 매체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대중들에게 소비하게끔 만들고 싶은 큐레이터의 고민이 어떻게 녹아있을지 궁금해 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그렇게 높지는 않다. 지하를 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였고 그 위에 높은 층들로 건물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이 점은 참 맘에 들었다.

#관찰 기록을 다듬은 몇 가지

펑크족들로 구성된 독일인들, 나치의 형상 그리고 언뜻 보이는 구소련 내지 구동독의 상징들. 정치권력의 이미지로 삼았던 말, 독수리 등등.. 군상들의 자세가 제각각 독립적이다. 독립적이라고만 하기엔 너무도 이질적인 자세와 분위기가 한데 어울려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분열과 혼잡한 상징들이 어떤 큰 흐름 속에서 압축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 캔버스에서 일관되게 나타난 펑크적인 느낌과 어둡지만 붉은 피가 생각나는 색감 때문일까.

 

수학과 미적 엔터티의 결합에 관한 오랜 전통. 어떤 전통이 오래될수록 그것을 ‘현대적 재해석’함은 쉽사리 피상적일 가능성이 크다. 충분히 쌓인 데이터에 미적 변형만 가하면 그럴듯해 보일 수 있기에. 그러나 본 전시의 시도는 우리의 기억과 현재를 둘러싼 주제(수능, 땅값 등)를 삼아 현실성과 참신함을 얻었다.

디자이너 집단이 현대 미술의 카테고리로 자연스럽게 포월된다. 예술과 기술 그리고 디자인 분야 자체를 포월 운동함으로써 디자인 직의 가능성이 여기 현대 미술에 자리잡는다. 가능성의 실험으로 끝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바우하우스인가? 이렇게 의문했지만 나조차 바우하우스의 실험이 제대로 기능하고 실현되었던 역사가 있었나 의문스럽고, 어찌됐든 그들의 이념이 디자인사의 영원한 주제로 남을 것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실험이 실험인 까닭에 – 바로 폐기될 것은 아니나 – 똑같은 변주 반복은 말할 것도 없이 무가치하며, 이런식으로 단지 박물관의 한 켠으로만 위치시키는 것은 언제나 불만족스럽다.

그렇지만 전시의 데이터에서 특기할 수 있는 바는 있다. 데이터에는 바우하우스 학생들의 자유로운 몸짓들로 가득하다. 바우하우스 집단의 역사적 가치와는 별도로 그들이 누렸던 그리고 풍부하게 실천하였던 미시적 순간들이 뜨겁게 빛나고 있다.

 

건축의 해부는 도시성을 이루는 매체의 상세한 재현 열망으로 보인다. 우리가 처한 공간들의 도면, 실무자들의 담론, 이야기, 노트 등은 도시성의 외관에 쏟아진 지적, 자본적 열정들을 보여준다. 건물이 현대인의 욕망을 콘크리트로 재현한 결과물이라면, 본 전시는 그 결과물의 ‘상황’을 재현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친절하지 않다. 주제만 덩그러니 분류한 채 그 안에 담긴 질료의 배열을 고민하지 않고 널부러져 있는 모양새는 전시의 그럴듯한 ‘개념어’를 무색하게 만든다.

도시적인 것서울적인 것은 내게 무언의 압박감과 도태의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다이 곳 미술관의 새하얀 벽과 타일 그리고 인문적 메시지들이 차용된 글씨들의 파노라마는 온갖 도시의 욕망들을 정제하여 압축시켜 놓은 추상처럼 느껴졌다도시의 거리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외면한 채 속도전 벌이듯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시선의 교차를 통해 서로를 번잡스럽게 대상화하지 않을 수 없는 군중의 자기 함몰이 있다미술관 안의 거리에서 대상화되는 것은 작품과 그 작품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일 뿐이며 그 거리를 이루는 극도의 정제함심플함은 모종의 위안거리가 되는 것 같다극심하게 유동적이면서 침묵하지만 내적으로는 온갖 스트레스로 인한 아우성들로 가득한 서울의 거리에서 탈주하여 영원한 현재로 접속하는 방편..  

 

– 서두 인용글 출처 – <레트로 마니아>, 사이먼 레이놀즈
– 존 듀이 출처 – <art as experience>
– 두 포스터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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