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과 디자인이라는 우연 앞에 서서

서로 다른 필연의 만남, 우연

일전에 나는 우연히라고 했다. 브랜딩 에어전시에 들어와 기획자라는 타이틀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인생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우연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우연이 하나의 ‘연’으로 내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선택하고 걸어온 많은 길들이 선행해야 한다. 모든 것을 우연이라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자신만이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연’으로 보는 것이며, 앞으로의 삶을 이끌기 위한 계기의 ‘연’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획자라는 연의 끈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지만, 수많은 나의 과거 흔적이 묻어 나와 내 앞에 등장한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웹사이트를 제작하면서 이미지와 콘텐츠를 어떻게 내보일지 고민하면서 ‘디자인’의 개념을 익혀온 것 그리고 새롭게 뜨는 비즈니스에 대해 유달리 관심을 가지고 머릿 속에 담아 온 것, 마지막으로 철학자가 되고자 노력하면서 우리 시대의 문화, 역사, 예술 등이 어떻게 걸어 왔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던 것. 이 모든 것이 기획자라는 우연의 타이틀을 통해 브랜딩 작업에서 실행한 과업의 지적 배경이 되어주었다.

 

오늘의 괴로움과 내일의 기대감으로

그렇다고 이 우연 앞에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처음 2주 동안은 나의 깜량에 심각한 회의를 했다. 하나의 기획서, 그 기획서에 들어갈 문장, 그 문장의 단어 하나를 적는 일조차도 30분 아니 1시간이 걸렸다. 내 자신이 그동안 써 온 문장은 철학적 텍스트에 경도되어 있었기에 비즈니스와 브랜딩 용어에 친숙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처음 기획서를 쓰는 동안 수많은 날을 새벽 야근으로 점철됐다. 분명 이 일의 성격, 지향점, 내용에 대해서는 자신의 성향과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무적으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습관을 버리고 생각하는 것, 쓰는 것, 말하는 것 모든 것의 변화가 필요했다. 처음 일하면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3개월은 이러한 고군분투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삶은 오늘 겪은 생생한 괴로움조차 내일이라는 새로움을 가져다 주기에 조금은 매번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동시에 인간의 불완전함을 조금씩이라도 개선할 기회를 준다. 이 때의 나는 매일매일 브랜딩적 사고, 브랜딩적 용어를 배우며 그날의 괴로움을 내일의 깨달음으로 변화시켰다.

 

 

새로운 우연을 기대하며

내가 쓰고 발표하는 기획서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이 일에 대해 욕망하고 꿈을 꿀 수 있는 크기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기획의 업에 어느정도 농익은 경험을 하고 나서는 새로운 욕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 욕망의 싹은 바로 디자인이다. 컨셉과 스토리텔링이라는 브랜드의 언어, 관점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적합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싶은 욕망, 바로 디자인에 대한 욕망이 내 안에서 새어 나온 것이다. 그동안 프로젝트에서 나는 기획을 하는 동시에 머릿 속에 그려지는 아이덴티티 이미지를 미리 생각했다. 새로운 브랜딩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컨셉과 이미지가 별도로 나오지 않고 하나의 그림으로 머릿 속에 그려졌다. 아이디어는 나에게 글과 이미지로 표현해달라는 강력한 요구를 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디자인을 시작했고, 지난 1년간 공부하고 습작을 했다. 다음 파트에 나올 내용은 이 기간 동안 작업한 결과물을 다룬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디자인과 나의 역사는 결코 짧지는 않다. 웹사이트를 이리저리 만드는 중학교 때부터 디자인의 개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이때부터 디자인에 취미로써 관심을 가지며 도움이 될 만한 곳에 디자인 작업을 해주기도 했다. 디자인은 애호의 영역으로 영원히 놔둘 생각이었지만, 그 ‘우연’이라는 만남이 즉 기획자로써의 경험이 디자인 욕망을 내게 구체화시켰다. 그리고 1년 간의 디자인 습작이 하나의 결과로 지금 내게 남았다. 이것이 비루한 시작이라 할지라도 나는 나를 배반하지 않는 행복한 시간이 보냈다. 디자인과 기획, 기획과 디자인. 나는 지금 이 두 가지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욕망을 우연히 만나길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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